종필이는 산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그는 하얀 겨울산에 깊은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사람들이 모두 들떠서 신나게 놀고 있을 때, 종필이는 혼나서 설악산으로 향했다.
오후 늦게 설악산에 도착한 종필이는 하룻밤을 산장에서 보냈다. 크리스마스의 아침이 밝자 종필이는 눈 덮인 대청봉을 향해 출발했다. 얼마 되지 않는 등산객이 드문드문 보일 뿐, 세상은 온통 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점심이 가까워질 무렵, 종필이는 누군가가 아까부터 자신의 뒤를 쫓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를 돌아다보니, 젊은 여인이 혼자서 종필이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는 이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저, 혼자 오셨습니까?"
"녜."
"마침 잘 됐군요. 저도 혼자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 대청봉이에요."
둘은 금세 친해져서 같이 점심을 해 먹고 대청봉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급경사에 이르자 여인이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오다가 아이젠(겨울산에서 등산화에 착용하는 톱니)을 하나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종필이는 오던 길을 되돌아 가다가 산비탈 아래에 아이젠 하나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내려갔다. 그 순간, 그의 발은 깊숙한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사력을 다해 나뭇가지를 하나 움켜쥐었다. 그 때, 종필이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여인의 무심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종필이는 여인과 함께 계속 눈길을 걸었다.
대청봉은 여전히 멀리서 두 사람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추워지자 그녀는 배낭에서 양주 한 병을 꺼냈다.
"비상용이에요. 종필씨, 좀 드시겠어요? 몸이 따듯해질 거예요."
"예. 참, 아가씨는 항상 혼자서 산에 다니십니까?"
"녜."
둘은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종필이는 어느새 몸이 더워지고 곧 졸음이 밀려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다음 날, 뉴스에서는 설악산에서 얼어 죽은 젊은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 라디오로 그 보도를 듣고 있던 젊은 등산객 하나가 조금 전에 산을 오르다 만난 여인에게 말했다.
"요즘 설악산에서 사고가 참 많이 나지요? 어제는 젊은 남자 하나가 얼어 죽고, 몇 일 전에는 대청봉 길에서 젊은 여자가 발을 헛디뎌서 추락하고……. 그런데 아가씨는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 대청봉이에요."
2013년 8월 15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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