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 무명씨@오픈 2014/12/03(수)16:29:09 ID:???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낳은 것을 후회할 레벨의 못난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이빨을 보이면서 웃지마라, 본 사람이 불쾌하게 되니까 라는 말도 들었다.
아이란 부모가 말하는 것은 모두 믿어버리는 것이니까,
나도 친부모조차 기분 나쁘다고 생각할 정도의 추녀구나 라고 믿으면서 자라나,
고교생 때에 마침내, 주위의 인간 모두가 나를 보고 웃고 있다,
바보취급 하고 있다, 기분 나쁘다고 여기고 있다는 망상에 씌어서,
전철에도 타지 못해서 학교에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에 부모는, 너는 진짜로 머리가 이상해졌다, 정신병원에 데리고 간다고 말했다.
나도 그 상태가 괴로웠기 때문에,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부모는 손바닥을 뒤집고, 그렇게 환자가 되고 싶은 건가,
그저 단순히 게으름 피우고 싶은 것 뿐 이겠지 게으름뱅이 굼뱅이라고 매도했다.
결국 그대로 8년간 히키코모리.
부모의 ○쨩은 대학에 갔다, ×쨩은 취직했다, △쨩는 결혼해서
아이도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초조함과 허무함이 뒤섞인 기분으로 들었다.
그리고 어느 날 드디어 생각했다.
그렇다, 성형하자.
아니 정확히는 좀 더 이전부터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상담할 때 부모에게 부모로부터 받은 소중한 몸에 상처를 내려는 건가,
건강하고 오체만족한데 일부러 메스를 대는 건가 하는 말을 듣고 체념하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어느 때 문득, 부모조차 기분나빠기분나뻐 못난이못난이라고 하는 몸을 소중히 하는 의미 있는 거야? 라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해도 오래 가지는 않았다.
바로 미움받고 있다, 기분나빠하고 있다, 비웃음 당하고 있다고 굳게 믿어 버리니까.
그래도 3년 걸려서 20만엔 모으고, 그것을 꽉 쥐고 병원에 갔다.
갑자기 전부는 무리니까, 처음에는 눈매부터.
처음은 절개받을 생각이었지만, 카운셀링의 결과 매몰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듣고
그것으로 부탁했다.
그 날로 부분마취하고 조금씩 조금씩 꿰매서 종료.
여기까지가 나의 인생의 수라장.
가지고 있었던 색이 엷은 선글래스를 쓰고 밖에 나왔을 때, 온 세상이 굉장히 밝게 보였다.
뭐라고 할지, 눈부시게 빛나는 느낌. 자신도 바뀌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에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오래 계속 되었다.
상대의 눈을 보고 이야기할 수 있다, 밝고 건강하게 안녕하세요 라고 말할 수 있기만 해도
이렇게 인간관계가 바뀌다니 하고 놀랐다.
성형비용 남은 걸로 미용실에 가고, 옷을 사고, 메이크업의 책을 사고 약국에서 도구를 갖추고,
다른 사람처럼 몸치장할 수 있게 될 때에는,
어라? 나 혹시 어쩌면 보는 것만으로 불쾌해질 정도로
기분나쁜 추녀는 아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새롭게 저금 다시 하고, 동경했던 고교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설령 야간이었지만.
나이 30이나 되서 여고생. 부끄러웠지만 즐거웠다.
더욱 돈을 모으고 전문학교 가서, 정사원으로 취직. 결국 성형은 1번 밖에 하지 않았다.
부모는 처음에, 불효자 미치광이라고 매도했지만, 남들에게 내가 칭찬받는 일이 많아지면
또다시 손바닥 뒤집고 자랑스러운 딸이랍니다—(하트)하며 데리고 다니려 하게 되었다.
지금도 연말 연시는 돌아오라고 지시가 왔다. 돌아가지 않지만요.
장례식 정도는 나갈까나? 모르겠다. 나가지 않을지도.
今までにあった修羅場を語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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