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名無しさん@おーぷん 2015/10/27(火)22:06:36 ID:Acq
결혼하고 5년 지나고, 이것저것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임신할 수 없어서 아이를 단념하기로 했을 때, 남편의 남동생이 급사했다.
아직 10개월된 여자 아이를 남겨놓고.
시동생의 부인이라는게 터무니 없는 여자라서,
「아이를 떠맡을 생각은 없다」
래.
「자신은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기르는 것은 무리이고, 아이가 있으면 재혼할 수 없고」
라고 확실하게 말했다.
보험금이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대단한 금액에 들어 있지 않았던 것 같고, 어느 정도 나왔는지는 모르는데
「요만큼 밖에 안되서 나 혼자가 고작」
이라고 말하며, 지금부터 혼자서 아이를 기르겠다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부부 사이에 이혼이야기가 나왔었다는 것을 이 때 처음으로 알았다.
당시의 본심을 말하자면,
(어째서 이런 곳에는 폭 하고 간단히 태어나는 거지)
하고, 그것이 조금 저주스러웠다.
시부모 모두, 우리에게 손자를 바랄 수 없기 때문에 죽은 차남의 아이를 떠나보내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고, 나도 남편과 피의 연결이 있는 아기라고 생각하면 사랑스러웠던 것도 있었고,
(부친이 돌아가시고, 모친이 이래선 불쌍하다)
하고 생각해 버려서, 우리 부부가 양녀로 맞이해서 기르기로 했다.
시동생의 부인은
「그렇게 해주면 고맙네. 이것으로 안심하고 나갈 수 있어」
라고 말했다.
이 때의 마음은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290: 名無しさん@おーぷん 2015/10/27(火)22:06:49 ID:Acq
그리고 나서는 시어머니에게 상담&협력하면서 열심히 길렀다.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대로,
「자신의 아들(남편)에게 불임 원인이 있어서 괴로운 불임 치료를 하게 했는데, 게다가 차남 부부의 뒷처리까지 시켜서…」
하며 나에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내가 보자면 육아 경험자인 시어머니가 없었으면 도저히 제대로 기를 수 없었고(나는 부녀가정이었으므로),
「그런 말은 하지 마시고, 함께 길러요」
하는 느낌으로, 별로 좋은 아내인 척 할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필사적이었다.
그저 필사적이었다.
시아버지도 정년이 가까웠는데, 손자가 함께 살게 된 바로 그때 의욕에 넘쳐서 자회사에서 일하기 시작, 남편도 그때까지 이상으로 일에 몰두, 남자 2마력 수입으로 생활 불안도 없었다.
다행히 딸은 정말로 상냥하고 좋은 아이로 자라 주었고, 친구도 많았다.
정신을 차리면 당연하게 자신의 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여러가지 있었지만, 결국 데려온 것은 정답이었다고 생각했다.
291: 名無しさん@おーぷん 2015/10/27(火)22:07:00 ID:Acq
하지만, 딸이 고교생 때 갑자기 그 여자가 나타났다.
「나의 딸이다, 친권을 돌려줘」
라고.
게다가
「대학 따위는 가지말고 가게(스넥바)를 도와라」
라면서.
술취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딸의 하교길에서 매복.
전 시동생 아내로부터는
「아이를 낳는 아픔을 패스하고 기르는 즐거움만 훔쳐갔다」
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기르는 즐거움을 방폐한 것은 자신이 아닌가.
즐거운 일만 있을 리가 없다.
시동생의 아이를 기르는 책임의 무게에 몇 번 짓눌릴 뻔 했는지 알지도 못하고.
이 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수라장이었다.
양자결연의 해소를 요구받았지만, 그런 요구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없다.
딸은 이제 우리 부부의 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시어머니와 교대로 바래다주며 지켰다.
다행히 좋은 친구를 타고 났으므로, 그녀들이 협력도 해줬다.
그리고 졸업 뒤에는 남편이 외국에 사는 친구 부부에게 부탁해서 해외로.
이러쿵 저러쿵 극복했지만,
최근 풍문으로 전 시동생 아내가 암으로 여생선고를 받은 것 같다고 들었다.
가게는 벌써 남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리얼에서는 말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빨리 죽었으면 한다.
그래야 겨우 진심으로 평온하게 살아갈 수 있다.
今までにあった最大の修羅場を語るスレ6 より
http://kohada.open2ch.net/test/read.cgi/kankon/1440498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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