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4: 무명씨@오픈 2015/06/17(수)11:58:39 ID:aQW
최근 쓸데없이 다른 스레에서 형제자매의 생활과 비교해서 비굴하게 되어있는 기사를 읽는데, 나도 자매 가운데 제일 비참한 생활을 지냈다.
옛날은.
언니와 여동생이 있는데, 두 사람 모두 신랑이 고수입이고 전업주부로 지냈다.
친구끼리 항상 화제의 맛집 스팟 순회를 하거나, 교습이다 여행이다 하는 우아한 생활.
살고 있는 맨션도 소위 디자이너스 맨션으로 멋지다.
거기에 비교하여 나는 신혼 당초부터 2DK UR 임대생활로, 나도 파트 타이머로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도저히 생활 할 수 없었고, 절약하고 절약해서 겨우 저금을 할 수 있다 라는 느낌.
자매 가운데서는 나 혼자만 비행기 거리에 시집갔으므로, 귀성 비용을 짜내는 것도 큰 일이었다.
※) UR임대 : 일본주택공단, 현재의 독립행정법인 도시재생기구에서 임대하는 아파트.
한 번 여동생이 나의 집에 숙박하러 놀러 왔을 때, 첫마디가
「우와—, 굉장한 압박감. 잘도 이런 곳에 살 수 있는네~ 싫어싫어」
라더라.
굉장히 화가 났지만
「하지만 정들면 고향이야」
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
비참했다.
하지만 이것이 현실.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해서 이 사람과 쭉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했다고 생각하고, 그런 격차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결혼하고 10년 정도 지나 더욱 더 격차가 커져, 언니도 여동생도 시부모의 원조를 받아 단독주택 마이홈을 세웠지만, 우리 집은 시어머니가 뇌일혈로 쓰러져 동거하게 되었다(남편이 외동).
시아버지는 다리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제대로 개호할 수 없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
개호 생활은 힘들었고, 급성 요통도 있었고, 피로 골절도 했지만,
남편은 잘 배려해 주었고, 시아버지는 반대로 이쪽이 황송할 정도로 정도 언제나 언제나
「고마워 고마워」
라고 말해 주셨기 때문에, 그 집안에서는 정신적으로는 불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체가 힘들었을 뿐.
455: 무명씨@오픈 2015/06/17(수)11:58:44 ID:aQW
40대도 반쯤 되었을 때, 언니나 여동생과 생활이 역전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맥이 빠진 듯이 시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두 사람으로부터 남편이 상속받은 집이나 예저금・주식으로, 개호가 끝났을 뿐만 아니라 생활수준도 단번에 올라갔다.
한편, 언니도 여동생도 집을 세울 때 시부모에게 계약금을 받은 약점으로 개호 문제에서 도망칠 수 없고, 시형제자매와 옥신각신했다.
게다가, 언니는 형부(언니의 남편)가 언니가 모르는 사이에 자식을 낳게 했던 것이 들키고 그 쪽에서도 옥신각신 플러스.
여동생에 이르러서는, 제부(여동생의 남편)가 일에서 대실패했다고 하는데, 한직으로 이동하게 된 걸 프라이드가 용납하지 못해 멋대로 회사 퇴직.
연령이 연령이니까 재취직도 제대로 되지 않고, 그 뒤는 파칭코쟁이 일직선이라 골머리를 썩고 있다.
친정 부모님은 심로 탓인지 단번에 백발이 늘었다.
그리고, 이 상황이 되서 부모님이나 언니나 여동생이 나를
「너는 운이 좋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지금의 생활이 될 때까지의 고생을 완전히 무시하고 “운이 좋다”니 뭐하자는 걸까.
차갑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이제 부모님도 언니도 여동생도 가족은 아니다.
죽은 시부모와 남편과 아이들 뿐이다. 가족은.
スレ立てるまでもないが沢山言いたいop 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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