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30일 목요일

【storyis 일본풍속】음양도(陰陽道), 음양사(陰陽師)

음양도(陰陽道)는 중국에서 도교와 불교를 통하여 전래된 음양오행설, 십간십이지설을 활용하여 일본에서 6세기 헤이안 시대 무렵에 발전한 방술(方術)이다. 음양도에 따라서 점을 쳐서 국가와 사회, 개인의 다양한 분야에서 재이와 길흉을 파악하고, 지침을 내리는 주술 체계가 발전하였다.

일본의 고대 율령제에서는 중무성(中務省) 아래에 음양료(陰陽寮)라는 기관이 설치되었으며, 여기에 음양박사(陰陽博士), 천문박사(天文博士, 천문을 관측), 누각박사(漏刻博士, 물시계인 누각을 살펴보고 시간을 알림), 역박사(暦博士, 달력을 만듬)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음양사는 음량료에 소속되어 있던 관직의 하나로, 이후에 일본 각지에 배치되었다. 음양사는 음양도에 따라서 점을 치거나, 길흉을 파악하고 그에 대하여 주술적인 대처를 하였다. 자연지리학과 기상예보, 질병 치료 등의 기술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이러한 분야에서 당시 나름대로 과학적인 연구를 하기도 했다.

동시에 민간 신앙에서는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 같은 유명한 음양사의 전설이 퍼지고, 이 가운데 '퇴마행' 같은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퇴마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음양도의 역사》 
본래 헤이안 시대에 음양도는 국가에 소속된 전문적 지식인이었으나, 점차 종교적 카리스마를 가지게 되면서 천황은 물론 공경귀족들의 삶이나 정치에도 간섭하게 된다. 그러나, 무사들이 권력을 가지고 막부가 성립하여 지배체계가 만들어 지면서, 천황의 조정이 무력화 되고 조정의 권위가 쇠퇴하면서 점차 국가 주도의 음양도는 쇠퇴하게 된다.

그 대신에 국가에서 독점되던 음양사의 지식은 민간으로 유출되었다. 음양사를 자칭하게 된 민간 음양사들은 점복 등을 민간에서 행하면서 민간에서 음양사의 활동을 벌이게 된다. 전통적인 국가 주도 음양사들은 막부와 결탁하여 권위를 유지하였는데, 음양사의 우두머리를 대대로 세습하게 된 아베노(安倍) 씨족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막부와 결탁하여 우대를 받고 츠치미카도 가문(土御門)으로 가문의 이름을 짓게 된다. 에도 막부 시대에 츠치미카도 가문은 전국의 모든 음양사를 통솔하는 지위를 얻었다.

《음양사의 몰락》
그러나, 근대 과학 기술의 도입과 함께 음양사의 지위는 점차 저하하게 된다. 특히 '역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에도 막부는 중국과 서양에서 전래된 새로운 천문 지식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경쟁하던 츠치미카도 가문이 만든 역법은 부정확함을 드러내고 말았던 것이다.

에도시대 전기에 음양사들이 발표하던 전통 역법은 오랜 세월 오차가 누적되어 실제 천문 운행보다 2일이나 앞서고 있었다. 역학자 시부카와 하루미(渋川 春海)는 중국 명나라의 수시력(授時暦)을 바탕으로 하여 개량을 거쳐 야마토 력(大和暦)을 발표하였고, 이것이 1685년 에도 막부에 채용되어 조쿄력(貞享暦)으로서 쓰이게 된다. 이 때 막부에서 천문방(天文方)이 설치되고 하루미가 여기에 취임하면서 츠치미카도 가문이 우두머리를 세습하던 음양료가 독점해왔던 달력 발행이 막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청나라에서 시헌력(時憲暦)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시헌력이 예수회 신부들이 만들었다는 것을 알자 막부에서는 기독교 색체를 배제하면서 서양 천문학을 도입하여 역법을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츠치미카도 가문이 정치력을 발휘하여 역법 개정의 주도권을 가져왔고, 자신들이 만든 역법을 도입한다. 이것이1755년 도입된 호레키력(宝暦暦)이다.

그런데 오히려 이 때문에 망신을 당하게 된다. 1763년 10월 7일에 일식 예측이 빗나가 버렸던 것. 당시 서양 천문학을 배운 민간 천문학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일식을 예측하였는데 정작 국가 주도의 음양사들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개정을 거듭하였으나 오히려 전의 조쿄력보다 나쁘다는 평가만 받게 된다.

결국 다시 막부 주도로 재개정이 일어났다. 1798년 간세이력(寛政暦)으로 개정되었고, 1844년 천보력(天保暦)으로 개정되었는데 모두 서양 천문학을 기반으로 하여 개정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음양도는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발전을 가로막는 미신으로 여겨져 정부에 적대되었다. 1870년에는 공식적으로 음양료가 폐지되고, 1872년에는 음양도는 미신으로 여겨져서 민간에도 유포가 금지되었다.

《현재》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메이지 시대의 법령이 폐지되면서 금지령 역시 풀렸으며 츠치미카도 가문의 영지였던 후쿠이 현 지역에서 천사 츠치미카도 신도(天社土御門神道)라는 종교 단체로서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종교로서 음양도는 번성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대중작가들이 음양사를 소재로 삼고 활용하면서 음양도는 대중문화에서 널리 받아들여졌다. 음양사 역시 일본 대중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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