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8일 화요일

【storyis 고전괴담】신(神)으로 모셔진 고려의 간신 염흥방(高麗 廉興邦)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부친인 청계 김진(金璡)(1500∼1580)의 행적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김성일의 아버지 김진은 임하현(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임동면 일대)에서 학당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임하현 남쪽 산에 신당(神堂)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고려 말에 간신으로서 처형된 염흥방이 이 사당에서는 무당들에게 신(神)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김진은 이에 분노하여 염흥방의 사당을 파괴하고 무당들을 쫓아냈다.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 김공 진(金公璡)의 묘갈명(墓碣銘)》-『우복집(愚伏集)』
縣之南山有祠。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巫覡輩倚以作妖。肆爲誣惑。
(임하)현(縣)의 남쪽 산에 사당이 하나 있었는데, 고려의 염흥방(廉興邦)이 바로 그 사당의 신(神)이라고 전해져 왔다. 무격들이 이에 의지해 요사스러운 짓을 하면서 함부로 백성들을 무혹(誣惑)시켰다.
公馳往數之曰。汝以前朝巨奸。死有餘罪。豈可容汝不靈之鬼以惑愿民乎。
공이 달려가서 꾸짖기를, “염흥방아, 너는 전조(前朝)의 거간(巨奸)으로서 죽어도 그 죄가 남는 자이다. 그런데 어찌 네가 신령스럽지 않은 귀신이 되어 백성들을 현혹시키도록 내버려 둘 수가 있겠는가.” 하고는,
卽毀撤之。俗以稍定。
즉시 훼철하니 백성들의 습속이 차츰 안정되었다.

《성균관 생원을 지낸 선고 부군(先考府君)의 행장》-『학봉집』
有神堂在縣之南山高處。俗傳高麗廉興邦乃其神云。巫覡之徒。倚以爲妖。傷風敗俗。日以益甚。
임하현의 남쪽 산 높은 곳에 신당(神堂)이 하나 있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고려의 염흥방(廉興邦)이 그 신당의 신이라고 하였다. 무당의 무리들이 이에 의지하여 요사한 짓을 하면서 풍속을 무너뜨림이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
一日府君數其罪曰。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의 죄를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汝以前朝巨奸。死有餘罪。天地之所不容。其神 草本。身。 已死。其鬼不靈。豈可使居高臨下。以惑吾民乎。
염흥방 너는 고려조의 큰 간신으로 죽어도 남은 죄가 있어서 천지가 용납하지 않는 바이다. 그 신(神)은 이미 죽었고 그 귀(鬼)는 신령하지 않다. 그런데 어찌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우리 백성들을 미혹시킬 수 있겠는가.” 하고는,
卽令毁之。宛丘之俗。亦因此而小革焉。
즉시 허물어 버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완구(宛丘)의 풍속(風俗)이 이로 인하여 조금은 고쳐지게 되었다.

어떻게 염흥방은 안동에서 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일까? 그 까닭은 이 지역이 염흥방 일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가지에는 이 곳에 염흥방의 별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지명에도 염흥방과 관련된 전설이 존재한다.

《영가지(永嘉誌)》임하현
박곡촌(朴谷村) 현(縣)의 동쪽 10리에 있다. 염흥방(廉興邦)이 여기에다 별장을 지었다. 화(禍)가 일어나 재산을 다 몰수하였다. 옛터는 아직 있다. 

《안동시 임동면 망천리 지명전설》
마을 명칭에 얽힌 전설이 있는데 고려말에 염흥방이란 자가 있었는데 그는 사병을 길러 그 세력이 막강하자 약탈을 일삼았다. 나라에서 관군을 보내어 마을 앞 반변천(半邊川)에서 토벌하니 그 사병들이 이곳에서 전멸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곳을 망지내(亡地川)라 칭하였다. 그러나 그 후 지명에 망(亡)자가 있어 좋지 않다고 하여 망천으로 고쳤다. 기사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가 있다.

……그런데 김성일의 아버지 김진에 의해 안동의 동부지역은 性理學이 본격적으로 이해되어 나가는 계기가 주어졌다. 본래 임하현 지역에는 고려 말 權臣인 廉価邦의 사당이 있었고, 16세기 중엽까지 염흥방이 이 지역의 성황신으로 모셔지고 있었다. 염흥방의 아버지 廉悌臣의 장인이 安東人 權漢功이므로 염제신이 안동의 임하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 같으며 이 때문에 曲城府院君과 曲城伯에 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염흥방의 농장이 안동 임하에 있었고 그 세력이 조선 중기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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